향에 미쳐 맛에 끌려 “콩사냥꾼” 세계를 떠돌다
올해 1월 안명규씨가 방문했던 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의 인헤르토 농장에서 농부들이 수확한 커피의 무게를 재고 있다. 안영규 제공.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생두 찾아 대륙 탐험하는 커피 산지 전문가의 세계
커피 한 스푼에 설탕 두 스푼, 그리고 ‘프림’은 조금만. 10년 전만 해도 ‘커피’ 하면 인스턴트커피를 떠올렸다. 하지만 국내 커피 문화도 한참 바뀌었다. 유명 커피전문점에서 ‘테이크 아웃!’을 외치는 걸로는 ‘차도남’ 축에도 못 낀다. 이제는 보르도 와인 찾듯 에티오피아산, 케냐산 등 커피 산지에 따라 다른 커피를 골라 먹는 이들이 많다. 커피업계에서는 전세계에서 10%의 질 좋은 커피를 ‘스페셜티’라고 부른다. 좋은 커피는 직접 산지에서 들여와야 한다. 이처럼 새로운 커피를 발견하고 찾아내는 사람을 커피 헌터, 또는 산지 전문가라고 부른다. 가 아직은 낯선 국내의 커피 생두 산지 전문가 3명을 만나 그들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커피에서 대륙의 기질을 맛보다
안명규(48·사진) 커피명가 대표의 별명은 ‘커피 전도사’다. 인스턴트커피가 대부분이었던 1990년대 대구에 원두커피 전문점 ‘커피명가’를 내고 당시에는 생소했던 로스팅(배전), 생두 산지 직거래 등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커피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오래전 ‘테이스터스초이스 수프리모’ 텔레비전 광고 모델로도 각인돼 있다.
그런 그가 커피 산지를 가야겠다 느꼈던 것은 2000년 초반이었다. 다양하고 전문적인 커피를 보급해왔다 자부했지만, 1998년 스타벅스 등 브랜드 커피숍이 국내에 상륙하고 ‘에스프레소’ 문화가 퍼지며 한계를 느꼈다. “일본 커피 서적의 번역서로만 알던 배전 기술로 이리저리 생두를 볶아봐도 그 맛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아, 재료가 중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2002년 처음 찾아간 산지는 인도네시아였다. 당시 국내 커피업계에서는 그저 입소문으로 어디 커피 생두가 좋더라 정도 말할 수 있던 수준이었다. “커피는 3박자가 맞아야 잘 자란다고 합니다. 자연·지리적인 조건(고도·토양·위치 등), 신의 선물(일조량·강수량), 그리고 농부들의 노력. 산지를 찾는 이들도 이런 것을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좋은 커피를 고를 수 있더라고요.” 아무것도 모른 채 카메라와 짐만 챙겨서 떠난 답사는 2005년 중남미, 2006년에는 예멘·아프리카까지 이어졌다. 최근에도 1년에 3번은 산지를 찾는 그의 여정은 커피를 보는 안목을 넓히는 과정이다.
현장에서 값진 지식도 많이 얻는다. “책에서 봤던 것과 다른 게 너무 많더라고요. 상식을 뒤집는 것도요.” 실제로 커피가 유명하지 않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론상으로는 로부스타종 커피나무만 자랄 수 있는 해발 300m 지형에서 아라비카종 나무를 발견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비싼 값에 파는 ‘코피 루왁’(사향고양이에게 생두를 먹인 뒤 나온 배설물로 만든 커피)이 실제로 근처 섬 동티모르에서는 더러워 먹지 않는다는 것도 놀라웠다.
농장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아프리카의 현실도 알게 됐다. “아프리카 커피 농장의 아동 노동 착취를 많이들 이야기하잖아요. 실제 케냐에 가보니 유목민처럼 살더라고요. 착취라기보다는 부모 따라 커피 따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죠.” 그 뒤로 그는 직거래를 하는 농장을 찾을 때마다 놀이터·화장실을 지어주고 태권도 공연, 하모니카·축구공 선물 등을 준비해 가고 있다.
최근 그는 과테말라·엘살바도르·콜롬비아 등을 많이 찾는다. 질 좋고 새로운 커피를 들여오려면 쉴 틈이 없다. “최고의 커피는 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의 인헤르토 농장에서 난 커피예요. 진짜 세계 최고죠.” 처음 콜롬비아에 갔을 때 은행원에게 속아 돈 털리고 목숨을 빼앗길 뻔한 아찔한 경험도 했지만, 좋은 커피를 들여올 때는 잊게 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죠. 지금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거 같네요.”
그는 ‘커피는 거울’이라고 했다. “커피에는 그 대륙의 기질이 그대로 녹아 있어요. 맛에도 그 기질이 녹아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커피 문화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다. “제가 한 10여년 전에는 ‘커피는 터미널 같다’고 했었어요. 소통의 공간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제는 문화가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아요. 커피의 소비 과정 가운데 스스로 해먹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게다가 공급자 중심의 ‘빨리빨리’ 문화가 담겨 있죠. 마시는 사람이 고르고 느끼는 소통의 커피가 되는 게 진정한 커피의 문화 아닐까요?”